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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rt Critic

빈칸 만들기의 반-급진성에 대하여

still

2024

Single channal video, color, sound, 15'41"

(사진. 수림문화재단, 수림큐브 / 촬영. 조준용)

 

 

 

 

빈칸 만들기의 반-급진성에 대하여

 

 

글. 황재민(미술평론)

 

 

 

 

1. 《화이트스페이스(White Space)》(2024) 혹은 빈칸 만들기

 

《화이트스페이스(White Space)》는 여러 겹의 의미로 풀이된다. 빈칸 혹은 빈 공간,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화이트스페이스'.

'화이트스페이스'는 어쩌면 '화이트큐브'와 비교된다. 화이트큐브는 장치다. 그것은 지각을 형식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격리 장치이며1), 구별짓기의 장으로 작동하는 폐쇄 장치다.2) 반면 화이트스페이스는 상태다. '백색의 큐브'가 아니라 '백색의 공간'으로써, 《화이트스페이스》는 비어 있는 어떤 상태, 쓰이기를 기다리는 텅 빈 문서, 언제든 무언가가 벌어질 수 있는 잠재성의 상태를 상기시킨다.

 

이러한 빈칸의 느낌을 상기시키면서, 《화이트스페이스》는 "변화의 과정을 사유할 시간이 점차 소멸하는 시대에"3) 전시라는 매체의 쓰임을 고민한다. 모든 것이 번잡스럽고 가득 차 있고 불필요할 정도로 최신의 담론으로 잔뜩 꾸며진, 너무 많고 또 너무 빠른 시간으로부터 잠시 멀어져, '사유의 시간'을, 텅 빈 공백의 시간을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궁금증이 든다. 전시는 언제나 사물과 실천이 가득하고, 그래야만 하는 장소로 여겨진다. 전시 공간이 비어 보인다는 평가는 호평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빈칸은 미덕이 아니라 차라리 시빗거리가 된다. 나아가, 전시는 빈칸마저 언제나 실천으로 포섭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그러니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다. 정말로 전시로부터 '사유의 시간'이, 빈칸이 나타나는 게 가능할까?

 

 

2. 급진성과 파시즘의 데칼코마니

 

《화이트스페이스》의 전시 서문은 미래주의 필리포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를 인용하며 시작된다. 마리네티가 남긴 두 개의 글, 「미래주의자 선언문(The Manifesto of Futurism, Manifesto del Futurismo)」(1909)는 느닷없는 고함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자, 친구들이여! 떠나자!4) 겁쟁이들과 전쟁을 벌이자!5) 이 널리 알려진 글에서, 미래라는 것은 군용 철도를 건설하고, 비행기를 설계하고, 그것으로 '통풍에 걸리고 마비된 나병 환자 같은 민중'을 학살한 결과 비로소 도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6) 마리네티는 "공격성이 없는 작품은 걸작이 될 수 없"으며 예술이란 곧 "폭력적 공격'7)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급진성과 새로움의 가능성에 강렬하게 매혹되었던 격동기의 열감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만, 이러한 고함 사이에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와 여성혐오가, 그러니까 파시즘의 가능성이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쉬이 감추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마리네티의 글쓰기와 역사적 행보는 아방가르드 프로젝트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탈의 사례로 여겨지고는 했다. 그런데 이론가이자 행동주의적 미술가인 앤드루 휴이트(Andrew Hewitt)의 경우, 마리네티를 아방가르드의 일탈이나 오류로 간주하는 해석의 단순성에 반대하고 나선다. 휴이트는 저서 「파시스트 모더니즘(Fascist Modernism)」(1993)에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부흥기, 약 1910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그 시기가 파시즘이 가장 완성된 형태로 출현한 시기와 동일했다는 점을 환기한다. 저자는 아방가르드의 기획을 '예술과 삶의 화해(reconciliation)'로 간추린 페터 뷔르거(Peter Bürger)의 유토피아적 공식이 언제든 삶의 심미화로, 나아가 정치적 삶의 심미화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파시즘이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일탈이 아닌, 중요한 욕망이자 구성 요소가 아니었을까 질문한다.8)

 

아방가르드를 이끌었던 중대한 욕망 중 하나는 역사적 선형성(historical sequentiality)을 완결시키고자 하는 욕망, 역사적 최종장을 달성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욕망이었을 것이다.9) 모더니즘이 텍스트에 집착했다면 아방가르드는 실재(the real)에 집착했고,10) 텍스트 너머 실재를 향한 급진적 이행을 완수하기 위하여 역사의 소멸을 요구했다. 휴이트는 근대성(modernity)의 본질이 그것의 미완성(incompletion)과 불가능성(impossibility)에 있다고 보았다. 이때 미완성과 불가능성은, 연속성 혹은 선형성이라는 근대성의 지연 상태를 보조하는 힘으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묘사에서, 미완성과 불가능성은 여백의 공간을 남기는 역량으로, 그렇기에 부정성과 혁신이 침입할 수 있는 틈새 공간을 개방하는 역량으로 가능하게 된다.11) 근대성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면, 미완성 상태에 마침표를 찍고 역사적 클라이맥스를 구성하고자 했던 아방가르드의 욕망은, 그러한 틈새 공간을 폐쇄시키려는 폭력으로, 반동적인 형태의 힘으로 재배치될 수 있다. 말하자면 파시즘은 마리네티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아방가르드 프로젝트 자체에 숨겨져 있던 그림자나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파시즘은 도처에 있다. 전 지구적으로 부흥하고 있는 민족주의 운동과 주류 정치에서 부상하고 있는 극우주의적 레토릭은 이를 분명하게 증거한다. 알레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는 오늘의 시대 양식을 '후기 파시즘(late fascism)'이라고 정의한다. 후기 파시즘은 과거의 파시즘, 즉 고전적 파시즘과 비교해 몇 가지 중요한 차이를 갖는다. 토스카노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를 인용하면서, 고전적 파시즘이 '충족의 사기극(swindle of fulfilment)'이라고 말할 만한 정치적 기획에 근거했다고 서술한다. 블로흐에게 있어, 1930년대의 독일은 '비동시적인 대중(non-synchronous people)'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비동시적 대중은 서로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위치하기에, 다중적 시간성을 발생시키며 여러 층위의 다층적 모순을 생산하게 된다.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발생하는 어떠한 열망과 에너지를 포획하여 그것을 타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환원시켰다.12)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또한 그의 유명한 글에서, 파시스트 정치가 소유관계의 폐지를 지적한 바 있다.13) 요컨대 고전적 파시즘 대중은 이질성(heterogeneity), 비동시성(non-synchronicity), 유토피아적 충동, 반체제주의적 동력 등 급진적이고 충족 불가능하며 모호할 뿐 아니라 복잡한 열망에 노출되어 있었고, 파시스트 정치는 이 열망을 충족시켜 주겠다는 정치적 사기극을 통하여 대중을 조직했다. 

 

그런데 고전적 파시즘과 달리, 오늘날의 후기 파시즘 대중에겐 위와 같은 사회적 리비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후기 파시즘은 역사적 파시즘에서의 핵심적 결정 요인 중 하나였던 자본주의적 질서를 향한 혁명적 위협 또한 결여한 상태로 있다. 오히려 후기 파시즘 대중은 비동시성이나 이질성이 아니라, 동시성이라는 환상을 향한 허구적인 노스탤지어에 기반한다. 오늘날의 후기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노스탤지어에 붙들린 주체성을 허위적 전체성에 귀속시키면서, '충족의 사기극'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한다.14)

 

파시즘의 징후가 도처에서 나타는 시대에, 고전적 파시즘과 후기 파시즘의 질적 차이를 구체적으로 구분하는 토스카노의 시도는 용이하다. 고전적 파시즘과 후기 파시즘을 분류하지 않고 같은 종류의 파시즘으로 오인했을 때, 결과적으로 두 가지 다른 욕망을 오인하게 된다. 비동시성과 이질성에 기초한 고전적 파시즘의 욕망과, 동시성에 대한 허구적 노스탤지어에 기초한 후기 파시즘의 욕망을 혼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혼동은 비동시성, 이질성, 유토피아적 충동 등 고전적 파시즘이 추구했던 것이 모종의 급진성이었음을 결과적으로 망각하게 만들기에 위험하다.

 

이러한 망각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아방가르드가 추구한 급진성과 새로움에 대한 지향이 여전히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라는 사고방식 내에 그대로 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이른바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시대에 진입한 미술은, 이질성과 급진성을 가장 시급한 자원으로 요청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상상 가능한 미래가 전부 소진되었으니, 다소 폭력적일지라도 가장 급진적 형태의 상상을 동원하여 미래를 강제적으로 개방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초조함이 종종 관찰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아방가르드와 동시대 미술의 연결 속에서, 역사를 개방하기보다는 완결시키려는 파시즘적 기획으로 귀결될지 모른다. 동시대 미술은 그간 다양성, 복수성, 이질성, 나아가 비동시성이 출몰 가능한 장소를 만들고자 꾸준히 고민해 왔다. 하지만 이와 같은 추구는, 파시즘의 증상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도 파시즘의 역학 자체가 거의 망각되어버린 오늘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술이 파시즘의 자리에 배치되어 버릴지도 모를, 그러한 위험성과 공명하게 되어버렸다.

 

어쩌면 《화이트스페이스》는 이 같은 위험을 의식한다. 관성적으로 전시를 만드는 일이 관성적인 급진성을 추구하는 일로 이어지고, 미시적인 파시즘의 생산과 분리되지 않을 때, 방향 자체를 재 설정해야 한다는 고민이 불쑥 돌출하게 된다. 그러므로 빈칸을 만들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전시장을 텅 비워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빈칸에 대한 추구는 또 하나의 문제 지점을 만들게 된다. 전시장을 비우는 일이 그 자체로 아방가르드의 반복이 되어버릴지 모른다는 문제다. 이브 클랭(Yves Klein)이 <빈 공간(Le Vide)>(1958)에서 미술관을 비워버린 것처럼, 존 케이지(John Cage)가 <4'33">(1952)에서 '음악'을 비워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빈칸을 만들되, 전시를 해야 한다. 이것은 빈칸을 만드는 것보다 더욱 복잡한 문제다.

 

《화이트스페이스》는 빈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전시가 빈칸에 준하는 중단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전시는 미술 실천의 언어를 하나의 번역 행위로 상상한다. 그리곤 번역을 어떤 언어(A)에서 다른 언어(A')로의 단순한 이동이 아닌 느리고 거친 움직임 과정으로 곱씹어 볼 것을, A와 A'에 차이를 부여하는 아포스트로피 기호의 작은 미시성에 관심을 투자해 볼 것 을 제안한다.15)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오늘'을 천천히,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확장할 때, 그럴 때 화면에 가득 차는 빈칸 아닌 빈칸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급진성을 대신하여 추구되는 것은 믿음이다. 무언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시간을 들여 감각하고 확장해 냈을 때, 어떠한 "까끌까끌"16)함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 그리고 그러한 감각이 공유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어보는 것. 

 

 

3. 74개의 계단을 오르고 내리며

 

《화이트스페이스》는 지하부터 옥상에 이르는 수림큐브의 공간을 모두 사용했다. 관객은 계단을 오르고 옥상 문을 힘들여 열며 전시를 보아야 했는데, 《화이트스페이스》는 이러한 관람의 작은 여정을 전시가 갖는 특정성(specificity)과 같은 것으로 강조했다. "무려 74개의 계단을 오르고 내려"17)야 한다는 것, "1층-지하-2층-2층 테라스-옥상"18)에 이르는 공간을 살펴야 한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전시가 구체화한 감각적 요소에 해당했다. 

 

꽤 큰 공간을 전부 사용하고자 하였기에, 전시에는 작업이 무척 많았다. 김도연, 노혜리, 문이삭, 한진 등 네 명의 참여 작가의 신작과 구작이 위계를 불문하고 배열되어 있었다. 이는 《화이트스페이스》를 단숨에 포착하기 어려운, 큼지막한 실천의 덩어리로 환원했다. 작업을 하나하나 뜯어보거나, 구작과 신작 사이의 관계를 헤아리거나, 작가와 작가 간의 몽타주를 되새기거나, 전시 공간에 준비된 자료 아카이브를 뒤적이는 등, 준비된 경험을 전부 소화하고자 한다면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전시는 이처럼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미완된 이해로 미끄러지기 쉬운 상태처럼 느껴졌는데, 그러나 이와 같은 미끄러짐은 전시를 완결하는 대신 중단시키기 위한 목적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전시장 1층에 위치한 김도연의 회화, <빛과 겹의 풍경>(2024)은 공간을 가로지르며 크게 걸려 있었다. 회화에는 작가가 여러 장소를 여행하며 체화한 경험과 '느낌' 같은 서사적으로 이미지화한 형상이 잔뜩 배치되어 있었다. 무엇이라 말하기 어려운 그런 서사 속에서는 거대한 새나 나방부터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무까지, 다양한 주체의 형태가 강렬한 색조와 함께 드러난 채였다. 작업의 거대한 크기는 여행이라는 경험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수단처럼 여겨지기도 했는데, 이때 전시를 보는 관객은 작가와 상상을 공유하는 공모자가 되는 셈이었다. 

 

오늘날 여행이라는 경험은, 범상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종의 비-경험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한다.19)

전 지구화한 신자유주의 경제와 발달한 미디어 조건은 여행의 경험을 동질적인 것으로 일반화했고, 감각 가능한 모든 장소를 '비장소'로 환원해냈다. 모든 여행은 이제 얼마간 관광에 가깝다. 이렇게 보았을 때, 김도연이 자신의 이미지를 여행 경험으로부터 추출하려는 것은 의문스럽기도 했다. 비-경험으로부터 어떻게 이토록 강렬한 이미지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걸까?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회화가 오토마티즘(Automatisme, 자동기술법)적 제스처와 꿈의 묘사 사이에서 유예되어 있는 예술이라고 말한 적 있다.20) 오토마티즘의 초현실주의적 미학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듯한 김도연의 이미지는 이러한 브르통의 언급을 떠올리게끔 만든다. 브르통은 회화가 오토마티즘으로 생산할 수 있는 무의미를 직접적으로 매개하지 못하는, 형상 혹은 상징을 통해서만 무의미를 반영할 수 있는 한계를 가진다고 보았기에 '유예된 예술'이라는 표현을 썼다. 김도연의 회화에서 여행이라는 상태는 꿈을 대신한다. 초현실주의 회화가 온전히 꿈으로 향할 수 없었듯이, 김도연의 회화 역시 비경험화된 여행의 사회적 조건 속에 있기에 온전한 여행으로 향할 수 없다. 여기서 주체는 더 이상 꿈과 현실이라는 이항대립 사이에서 유예되는 것이 아니라, 거주지와 여행지 사이에서 유예된다. 김도연의 이미지는 여행으로부터 상상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유예된 상태로부터 상상되는 것이다. 다양한 주체들이 화면 속에 자리 잡는 작가의 회화는, 예된 상황, 진전되지 않은 상황, 미완된 답보 상태로부터 얼마나 다양한 상상이 가능한가를 진술한다. 

 

김도연에게 이동의 경험이 여행을 매개로 제시된다면, 노혜리에게 이동이란 이주의 경험과 밀접한 것이다. 단지 한 사람의, 하나의 신체가 어떠한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옮겨졌을 뿐인데, 그 단순한 이동으로부터 어떻게 이처럼 많은 정동과 서사가 파열하게 되는 것일까? <폴즈 인터뷰>(2022)는 어린 시적 미국으로 이주한 8명의 인터뷰를 담는다. 이들은 1997년, 2001년, 2017년이라는 상이한 시간대와 관련하여 각각 증언한다.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것처럼 들리던 이야기는 순간적으로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9.11 테러'와 같은 역사적 사건과 겹쳐졌다가,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재차 흩어지게 된다. 흡사 '배경'에 가까운 영상 위로 이주자의 목소리가 얹힐 때, 그것은 계속해서 배경화될 수밖에 없는 그들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코멘터리 같다. 

 

《화이트스페이스》에 전시된 노혜리의 몇몇 조형은 일시적으로 정지되어 있지만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였다. <혜리 크리스티나 메리>(2019/2024)와 <바다선>(2020/2024)과 같은 작업의 경우, 수년 전에 만들어진 조형이지만 2024-5년의 수림큐브라는 특정한 공간에 자리 잡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구성 요소를 조정하고 재설치한 결과였다. 이주 과정에서 이사를 다니고 짐을 줄이고 감각을 조절해야 하는 누군가처럼, 노혜리의 조형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고 상황에 자신을 맞추어 나갈 수 있는 가변성을 포함한다. 이러한 이동 가능성과 임시성은 분명 취약한 것일 테지만, 조형으로 이전되었을 때 잠재성이라는 역량의 형태와 구분되지 않는다. 

 

전시된 작가의 조형을 두고 보며, 새로운 것의 생산 없이, 과거의 것을 재배치하고 재배열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의미가 가능할까 곱씹어 보게 되기도 했다. 동시대 미술이 어떠한 실체나 본질을 제시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사물의 조정과 구성을 통하여 관계를 가시화하는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면, 노혜리의 조형은 과거를 깁고 다시 놓으면서 그러한 동시대성을 또한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한편, 한진은 자연적인 것의 흔적을 회화 프레임 가득 채운다. 자연 일부를 잘라낸 것 같은 <밤은 아직 기다려야 하고 낮은 이미 아니다. Op.2>(2023-2024)와 같은 경우, 분명히 그리기 위한 대상이 존재하고 형상 만들기를 적극 거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임에도, 결과물은 추상적인 것에 가깝게 나타난다. 아마도 이는 그리는 이가 대상을 온전히 포착하여 사유화할 수 있는 절대적인 거리를 취하기보다, 대상으로 거의 뛰어 들어간 것처럼 여겨지는 긴밀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눈(eye)이 갖는 주권을 포기한 뒤 이러한 가까움을 꽤 큰 화면으로 담아내었을 때, 자연은 이미지나 풍경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감각으로, 나아가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전시에서 회화와 함께 배치된 영상<still>(2024)은 매달려 흔들거리는 낙엽이나 바닥을 구르는 솔방울 등을 촬영한 작업이었는데, <still>은 완전히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풍경을 그저 바라보았을 때 미세한 운동과 생동을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단순하게, 어떻게 보면 무구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자연이라는 대상은 긴 기간 예술의 주제였지만, 오늘날 이 대상이 갖는 비가시성은 점차 문제적인 것이 되어가는 중이다. 인류세 또는 자본세라는 시기에 접어들면서 자연이 갖는 근본적 비가시성은 그것에 발생하고 확산 중인 위기 상태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도 동시에 미시적인 자연의 변환은 그 자신과 관계된 거의 모든 위기를 초래할 것이나, 이 과정은 일상화되고 비가시화되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롭 닉슨(Rob Nixon)이 말한 것과 같이, 계급적으로 불균등하게 작용하는 인류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시공을 뛰어넘어 널리 확산되는, 시간을 지체시키며 오랜 시간에 걸쳐 발생하는 폭력으로써 '느린 폭력(slow violence)'을 작동시키는 공간이기도 하다.21) 한진이 자연의 비가시적 움직임을 회화로, 또 영상으로 잡아채었을 때, 이러한 풍경은 생동하는 힘 못지않게 이와 같은 위기 역시 떠올리도록 만든다.

 

문이삭의 작업 또한 자연적인 것과 관계를 맺는다. 작가는 점토로 만든 조형에 한강에서 채취한 흙, 나무, 유리 등을 유약으로 만들어 바르며 세라믹 조각을 제작했다. 또한 동일한 재료를 긴 시간 닥섬유와 물에 개어 체어 걸러내고, 펼쳐서 말리는 과정을 경유하여 종이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더불어 작가는 110개의 세라믹 타일을 제작해 전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북악산, 북한산, 인왕산 등에서 기암괴석을 찾아다닌 경험을 물질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작가는 자연적인 것에서 비롯한 감각을, 자연으로부터 추출한 물질 자체를 조각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으며, 그러한 수행의 결과는 조각적인 것으로, 또 비조각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발품을 팔고 몸을 써가며 조형한 문이삭의 조각은 장소와 지역, 그리고 자연적인 것이 맞닿는 하나의 장으로 구획되는 듯했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게 자연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물적으로 포획하고자 할 때, 그러한 시도는 실패에 가까운 것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자연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그 유기적 구조로부터 추방된 것뿐이다. 문이삭의 조각에서 구체화되는 것은 즉물적 자연이 아니라 '한강에서 채취한 잔여물'이고, 마치 얼룩 같은 '종이' 조형이 바닥에 놓이고 전시장 기둥을 덮을 때 채취해낸 '자연'은 잉여나 부산물, 극단적으로는 '쓰레기'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곰팡이나 얼룩, 잉여와 같은 형상을 매개 삼아 자연과의 즉물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조각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라면 '엑스폼'이라 불렀을 법한 어떠한 형태로 상상될 수 있을 것이다. 부리오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억압되고 추방된 것이 쓰레기의 형태로 거슬러 돌아온다고 보았고, 이를 '엑스폼'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 적 있다. '엑스폼'의 출현 지점은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이 구성되는 지점이기도 하다.22) 문이삭의 조각은 즉물적 자연을 재구성하려는 욕망의 실패 속에서, 추방된 것을 맞아들이는 장소로 우연하게 개방된다. 

 

 

4. 느리고 더딘 가끔

 

《화이트스페이스》는 '사유의 시간'을 끌어내고자 했고, 나는 그것이 모종의 빈칸을 가시화하는 실천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작 내가 본 전시는 너무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빈칸이 필요하지만 빈칸을 만들 수 없을 때, 전시는 자연스럽게 자기모순으로 이끌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이러한 실천의 양상을 인류학자 제임스 C. 스콧(James C. Scott)이 말한 '은닉 대본'이라는 개념으로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스콧은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한다.'라는 파레시아(parrhesia)적 자기 말하기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지배계급과 피 지배계습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와 권력의 작동을 분석하기 위하여 진실을 말하는 요기가 아니라 "권력자의 면전에서 이루어지는 약자의 가식"23)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스콧은 이러한 "가식"을 '은닉 대본'이라 명명했는데, 지배자의 면전에서 이루어지는 피지배자의 언설이 일종의 '공개 대본'이라면, 권련자의 직접적 시선을 피해 막후에서 생산되는 언설을 '은닉 대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부연한다. 은닉 대본은 공개 대본에서 나타나는 내용을 부정하거나 굴절하는 막후의 언어이자, 권력이 부여하는 제약과 제한 내부에서 비밀스럽게 만들어지고 제시되는 몸짓과 관행이다.24)

 

미술 전시의 형태와 관습을 유지하되 급진성 이데올로기에 반발하는 《화이트스페이스》는 일정 부분 은닉 대본의 작동 방식을 닮아 있다. 은닉 대본은 특정한 행위자들 사이에서 제한적으로 통용되는 비림스러운 은어이며, 제한된 대중 사이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행위 범주라고 설명된다.25) 미술은 공공을 향해 열려 있는 실천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비밀스러운 은어'처럼 작동한다. 《화이트스페이스》의 공개 대본은 작업으로 가득 차 볼거리가 많은 또 하나의 전시다. 《화이트스페이스》의 은닉 대본은 관성적 전시 행위를 회의적으로 되새기며, 후기 파시즘 시대에 아방가르드적 급진성을 의심하기 위한 임시적 시도다. 전시를 만들어야만 함에도 전시를 회의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은닉 대본의 서사 구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성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연(representation) 된다. 스콧은 공개 대본과 은닉 대본의 불일치 사이에서 권력의 작동 방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만약 하나의 전시 또한 공개 대본과 은닉 대본을 가질 수 있다면, 둘 사이의 불일치로부터 미적인 것의 작동 방식이 드러난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론가 로런 벌랜트(Lauren Berlant)는 '사건'과 '환경'을 구분한 적 있다. 사건은 하나의 충격으로 이해된다. 사건은 중대한 인식론적 존재감을 부여받으며, 때로 역사적 단절을 가시화하는 균열 지점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하지만 벌랜트의 이야기에서 사건이란 사실 "어떤 것도 별로 변화시키지는 않"26)는 무엇이나 마찬가지다. 변화는 사건이 아니라 환경에서 발생한다.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반복되는 듯 보이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비가시화된, 그러나 구조적 조건이 스며들어 있는 그러한 환경으로부터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건을 생산하고자 하는 욕망은 역사를 완결시키고자 했던 아방가르드 프로젝트의 오랜 충동을 떠올리게 만든다. 필요한 것은 기어이 클라이맥스를 만들고자 하는 분출 행위가 아니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느리고 더딘 가끔일 테다. 《화이트스페이스》는 전시 만들기가 자기모순의 총량을 늘리는 것과 유사하게 느껴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사건이라는 충격을 시도하기보다 환경을 조성하기를 바라는 실천이다. 이곳에서 나타나는 것은 빈칸 없는 빈칸이며, 이와 같은 자기모순은 질문을 위한 유예된 장소를 만든다. 

 

 

 

 

 

1)  브라이언 오 도허티, 「하얀 입방체 안에서」, 김형숙 옮김, 시공사, 2006, 19-20쪽.

2)  캐롤 던컨, 「미술관이라는 환상」, 김용규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86쪽.

3)  김선옥, 「까글까끌한 표면과 지글거리는 화면에서 오래 머물기」, 《화이트스페이스》 전시 서문, 2024, 페이지 표기 없음.

4)  F. T. Marinetti, 「The Founding and Manifesto of Futurism」, Lawrence Rainey, Christine Poggi, and Laura Wittman, eds, 「Futurism: An Anthology」, Yale University Press, 2009, 49pp.

5)  Marinetti, 「Let's Murder the Moolight!」, Ibid, 54pp.

6)  "Now we have you in front of us, the teeming populace of Gout and Paralysis, a disgusting leprosy that's devouring the mountainsides...", Marinetti, Ibid, 61pp.

7)  김효신,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시 소고」, 「이탈리아어문학」(31), 2010, 76쪽. 

8)  Andrew Hewitt, 「Fascist Modernism」,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21pp. 

9)  Hewitt, Ibid, 7pp.

10) Hewitt, Ibid, 36pp.

11) Hewitt, Ibid, 43pp.

12) Alberto Toscano, 「Late Fascism」, Verso, 2023, chap. 1., 전자책 인용. 

13)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외」, 최성만 옮김, 길, 2007, 92-93쪽. 

14) Toscano, Ibid, 전자책 인용.

15) 김선옥, 같은 글.

16) 김선옥, 같은 글.

17) 김선옥, 같은 글.

18) 김선옥, 같은 글.

19) 마르크 오제, 「비장소」, 이윤영, 이상길 옮김, 아카넷, 106-107쪽.

20) 핼 포스터, 「강박적 아름다움」, 조주연 옮김, 아트북스, 2018, 19쪽에서 재인용. 

21) 롭 닉슨,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로, 2020, 18쪽.

22) 니콜라 부리오, 「엑스폼」, 정은영, 김일지 옮김, 현실문화A, 2022, 11쪽 

23) 제임스 C. 스콧,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전상인 옮김, 2020, 27쪽. 

24) 스콧, 같은 책, 31-32쪽.

25) 스콧, 같은 책, 47쪽.

26) 로런 벌랜트, 「잔인한 낙관」, 박미선, 윤조원 옮김, 후마니타스, 2024, 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