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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rt Critic

Haven of Light

 

 

서러운빛 Haven of Light

권현빈, 오종, 한진

2020. 07. 07 - 08. 15

P21 Gallery

기획. 장혜정

사진. 이의록

글. 김홍기 (미술비평)

 

 

조각과 회화와 설치로 꾸민 전시 『서러운 빛』(P21, 2020)의 공간을 서성이며 사진에 대해 생각해본다. 권현빈의 조각도, 한진의 회화도, 오종의 설치도 사진과는 꽤나 무관해 보이지만, 그것들이 한 전시 공간에서 서로 엮이자 어쩐지 각자가 독특한 방식으로 변주된 사진처럼 여겨진다. 이런 비약적인 생각은 역시 이 전시의 제목이 '서러운 빛'인 까닭에 생겨난 것이다. 서러움의 정체는 아직 헤아릴 길 없지만 빛이라는 단어는 금세 빛(photo)의 기록(graphy)인 사진(photography)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각각의 작품들은 다른 매체로 실현한 '사전적인'이미지일지도 모른다.

 

권현빈의 조각은 석회암판이나 화강암판으로 만들어진 두툼한 사진 원판과 같다. 작가는 작업실의 돌에 드리운 섬광,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등을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여 돌의 표면에 그리거나 새긴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빛과 그림자를 돌로 된 감광판 위에 현상하듯이 말이다. 네거티브가 현실의 명암을 반전하여 비 가시적인 빛의 존재를 방증하듯이, 권현빈의 조각은 석판 자체의 불규칙한 형상보다는 애초에 그것이 떨어져 나온 더 큰 덩어리의 돌을 상상(또는 추억)하게 만든다. 이런 효과는 작가가 석판에 새긴 이미지가 석판의 프레임에 온전히 담기지 않고 줄곧 프레임의 바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구름은 프레임의 말단에 아랑곳없이 두둥실 떠가고, 빛의 궤적은 프레임의 모서리에서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 석판이 그것보다 더 큰 전체에서 절단된 것임을 숨기지 않는다. 권현빈의 작품은 외화면(hors-chmp)을 강하게 암시하는 '사진적인' 조각이다. 

 

한진은 현실의 풍경이든 상상의 풍경이든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 기억을 반복적인 제스처로 화면에 옮기는 작가다. 전시 공간에 걸린 그의 회화를 보면 그가 사물과 풍경을 기억하는 방식이 매우 사진적임을, 더 정확히는 네거티브적임을 깨닫게 된다. 그의 지난 개인전들의 이름처럼 그의 회화는 좀처럼 지각되지 않는 '백색소음'을 화면에 가시화하며(White Noise), 그의 화면 속 세상에서 얼음은 칠흑처럼 검게 나타난다(흑빙). 이번에 전시된 그의 회화도 반전된 기억에서 비롯된 짙은 바람과 환한 밤을 보여준다. 그가 그린 나뭇가지들은 그것들을 흔들리게 하는 바람의 밀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며(「바람의 노래」), 그가 그린 밤풍경은 반전된 원판의 입자들처럼 환하고 빛난다(「스민 밤」). 이것이 사진이라면 그것은 오래도록 셔터를 열어 두어야 하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도록 암실에서 현상해야 겨우 얻어지는 귀한 내거티브일 것이다. 적어도 한진에게 회화란 그런 느리디 느린 사진일 것이다. 

 

오종은 그간 건축의 실내 구조에서 착안한 기하학적인 형태를 낚시줄, 실, 저울추, 안료 등 최소한의 재료로 구현한 설치 작업을 선보여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의 미니멀한 방법론은 여전하지만 그가 응시하는 대상은 전시공간의 건축적 구조가 아니라 그 공간을 주파하는 빛의 궤적이다. 주의를 기울여야 겨우 눈에 띄는 낚시줄이 전시 공간을 관통하는 빛의 기울기를 따라 팽팽한 시선으로 설치돼 있다. 이것은 가장 가날픈 부류의 빛의 기록일 것이다. 나타났다가 곧이어 사라져버린 덧없는 빛의 줄기가 그만큼이나 연약한 낚싯줄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것을 보이게 하지만 그 스스로는 형체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빛을 가장 빛처럼 기록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관객이 이 반투명한 빛의 기록을 발견하는 순간, 전시공간은 반전되어 비록 찰나일 뿐이라도 빛과 공기로 웅성거리게 된다. 

 

사실, 모든 사진적인 이미지는 서럽다. 그것이 앞선 한 시공간의 부재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선에 도착한 밤하늘의 별빛이 그 별의 죽음을 알리는 때늦은 부고인 것처럼 말이다. 사진의 시차가 만들어 내는 이 서러움이 전시공간을 환하게 채운다. 실시간으로 이미지가 구현되는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구름의 그림자를, 밤의 일렁임을, 전시공간의 빛을 오래 응시하고 오래 기록한다.

 

'빛의 안식처'를 정성껏 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