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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rt Critic

한진의 시법(詩法): 압운(押韻)의 시간, 해조(諧調)의 운율

사진: The Page Gallery / 촬영: Joel Moritz

 

 

 

한진의 시법(詩法): 압운(押韻)의 시간, 해조(諧調)의 운율

 

글. 안유리(미술 작가)

 

 

 

A poem should not mean
But be.
Ars Poetica by Archibald MacLeish

 

아치볼드 맥클리시의 ʻArs Poetica’는 라틴어로, ʻThe Art of Poetry’, 즉 시(詩)의 기법(技法) 혹은 시법(詩法)으로 옮겨 해석할 수 있다. 맥클리시가 제안하는 시(詩)가 갖추어야 할 또는 놓여 있어야 할 모습을 상상하며 따라 읽다가 결국 저 문장에 다다른다. 결국 시(詩)는, 그리고 예술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려 애쓰기에 앞서 존재해야만 하며, 그 존재한다는 것이 “그저 여기에 있다”의 증명은 아닐 것이다. ʻArs Poetica’의 뜻처럼,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작품 세계가 구축되고 작동하기 위해 나름의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수행의 반복을 통해 작품이라는 또 다른 자아로서 ʻ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러 단어들 가운데 내가 ʻ법(法)’을 쥐고 한진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려 하는 것은, 작품에 대해 스스로 타협하지 않으려는 원칙과 신념이 그녀가 창작하는 행위, 나아가 삶 전반에 걸쳐 무척 중요한 태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운이좋게도, 나는 지난 몇 년 간 한진의 작업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이미 두 편의 글을 보탰다. 이 글은 한진의 개인전 《아득한 울림》(2015),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2016), 《 흑빙(Black Ice)》(2018), 마지막으로 《벡사시옹(Vexations)》(2021)의 여정을 다시 반추하며, 최근에 참여한 그룹전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2024)을 통해 내가 새롭게 발견한 몇 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평소 기억하고 싶은 단어들을 기록해 두는데, 가끔 그것들 가운데 가까운 사람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것들이 있다.이 글은 동료 작가이자 친구로서, 한진의 다음 작품 여정을 즐겁게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고 잠시 기착지에서 그녀에게 전달하는 작은 노트이다.

 

“기이한 것이란 특정한 형태의 동요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포함된다. 기이한 존재 혹은 대상은 너무나 이상해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혹은 적어도 여기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그런 존재 혹은 사물이 여기에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껏 차용해 왔던 범주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결국, 기이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이해가 불충분했을 뿐이다.”

- 마크 피셔(Mark Fisher)1)

 

최근 더페이지 갤러리에서 열린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2024)에는 한진이 이전 전시에서 출품한 작품 중 일부를 선보였으나, 새로운 맥락과 공간에 놓여서인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작품들이 있다. 해안 절벽에 서서, 이른 아침에 시작해 한낮을 거쳐 해 질 무렵까지 바라본 모습을 담은 <해안선 Op.2>(2017-2018)는 한 캔버스에 축적된 여러 시간들이 오롯이 제자리를 찾아 ʻ불현듯' 외치듯이 내게 다가왔다. 한진은 이런 순간을 음악 용어인 ʻ스포르찬도(sfz)’와 닮았다고 이야기했다.2) 그것은 악센트(accent)처럼 앞과 뒤 음의 강세가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있게 연주되는 것과는 달리 여리게 건반을 계속 두드리다가 ʻ돌연히' 그 음의 떨림을 느낄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이다. 한진은 이것을 “이와 같은 시차는 ʻ유실’ 및 ʻ허상’의 상태와 닮아있다. 이들은 묵음과 같이 읽히지 않아도 존재하며 기억을 수식하는 중요한 단서로 남는다.”고 했다.3) 작가는 지속되는 시간을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ʻ묵음(默音)’으로 남길 바라는 시간에도 캔버스에 자리를 내어준 것처럼 보인다. 묵음( 默音)으로 표기되는 특정 단어들은 “어떤 소리에도 대응하지 않는 글”을 가리킨다. 나는 이 단어의 뜻을 한진의 작품을 보며 이렇게 바꿔보고 싶었다. “쉽사리 해독되고 정의하기를 거부하는 소리”.

 

작가는 2016년에 선보인 개인전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에서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무대를 상상하며 작품 설치를 시도한 적이 있다. 베케트에 대한 여러 글 중, 최근 다시 집어 든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책 속에서 다음 문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진이 말하고 있는, 그리고 내가 추측하는 묵음(默音)과 같은 태도가 아닐지 생각했다.

 

“잘 말하기란 확립된 의미들의 반복에 불과하다. 잘 보는 것과 잘 말하는 것은 법칙 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ʻ잘못 말하기’ 또는 ʻ잘못 보기’는 바로 이러한 법칙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오로지 잘못 말하기와 잘못 보기만이 이러한 법칙을 깨고 새로운 창안을 가능하게 한다. 법칙성을 파괴하는 사건을 기존의 법칙에 비추어 잘못 말하는 것이 바로 사건의 명명이다. 그 명명은 항상 ʻ잘못 말해진 것’의 질서 안에 있다.그리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것의 창안이 이루어진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4)

 

작가는 개인전 《벡사시옹(Vexations)》(2021)을 통해 동명의 에릭 사티(Erik Satie)의 곡 <벡사시옹(Vexations)>과 사무엘 베케트의 <쿼드(Quad)>에 영향을 받아 본인의 해석을 담은 작품 여러 점을 선보였다. 알다시피, 사티의 “840번 ʻ반복’하시오”라는 지시문을 담은 <벡사시옹(Vexations)> 악보와, 무대 위 배우들이 지칠 줄 모르는 듯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베케트의 <쿼드(Quad)>는 서로 닮은듯 느껴지는데, 나는 이 운동성과 그 흔적을 한진의 드로잉 연작 <Was in Sorrow in a Soft Air Op.1~Op.12>(2017~2018)와 <Tone Roads Op.1>(2016), <Tone Roads Op.2>(2017), <Tone Roads Op.4>(2019)를 통해 새삼 다시 발견했다. 앞서 언급한 단체전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2024)에서 한진은 독립된 공간에 위 작품들을 온전히 관람할 수 있도록 조도와 각각의 각도를 매우 세밀하게 연출했다. 순간 작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는데, 마치 문자 그대로 ʻ빛이 지나간 자리에 만들어진’ 드로잉으로 다가왔다. 영상 작가인 내게는 ʻ포토그램(photogram)’ 기법이 연상되었다. 라즐로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 만 레이(Man Ray) 등이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사용했던 포토그램은 사진기를 사용하지 않고 감광지 위에 물체를 놓고 빛을 비추어 음영으로 만드는 기술을 가리킨다. 포토그램의 가장 큰 묘미는 빛의 미묘한 해조(諧調)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 해조(諧調)는 대개 조화로움, 즐거운 가락 등으로 해석되는데, 이 경우 농담(濃淡) 기법처럼, 빛의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까지 균형 있게 나아가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내가 주목한 것은 ʻ해조(諧調)의 궤적’이다. 시작에서 끝을 향해 내달리기 위한 목적의 움직임이 아니라 운동 자체가 만들어내는 ʻ운율’ 감각을 한진의 드로잉 연작들에서 마주했다. 이것은 시(詩)작법 중 하나인 압운(押韻) 에 의해 만나게 되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동일한 소리의 반복이 빚어낸 아름다운 해조(諧調) 현상5)을 그려내기 위해 한진의 손은 부단히 움직였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전시에서 선보인 영상 작품 <That's how the light get's in>(2021)은, 작가가 잠시 손을 거두고 응시하는 자리에 말 그대로 빛이 그려졌다 사라진다. 이것은 마치 빛의 지층이 쌓였다 다시 퍼져 나가는 모습처럼 다가왔다.

 

결국 하나의 움직임을 반복한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감각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작가는 쉬지 않고 자신의 캔버스 앞에서 수행을 거듭한다. 때로는 그 가락이, 소리가, 세상의 기준에 익숙한 ʻ조화로움’이 아닐지라도, 자신만의 음을 찾아 쉴 새 없이 연주하듯 벽 앞에 서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한진의 그림에 등장하는 압운(押韻)의 시간이자, 해조(諧調)의 운율이다.

한진의 시법(詩法)이다.

 

 

1)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마크 피셔, 안현주 옮김, 구픽, 2023.

2) 작가노트, 한진, 2021.

3) 위와같음.

4) 「사건과 그 이름」, 『베케트에 대하여』, 알랭 바디우, 서용순, 임수현 옮김, 민음사, 2013.

5) 「우리 시의 압운(押韻)」, 『엄살의 시학』, 강홍기, 태학사, 2000.